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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니 채워지더라


″냉동실 발가벗고 나니 은행 갈 일 별로 없고 한 달 생활비가 고스란히 남아있어 부자 된 기분이다. (중략) 혼자 즐기는 법도 배우고 각자 위생을 챙기면서 희망을 가지면 그 또한 지나갈 것이다.”

대구에 살고 계신 박영자 할머니(74)가 휴대전화로 글쓰기 모임 지인들에게 보낸 ‘비우니 채워지더라’라는 글의 일부다.  박 할머니의 글에는 답답한 현실을 뒤집는 역설적인 힘과 희망이 엿보인다. 그리고  삶의 지혜를 나눠줄 노년의 재치와 해학이 문장마다 넘친다. 

박 할머니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한 달째 집에만 있었더니 무기력해지더라며 집안 여기저기를 정리하기 시작하셨고 한번 비워보자는 생각에 이것저것 정리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글 쓴 계기를 전했다고 한다. 

한국의 사태를 넘어 이젠 미국에도 사재기와 더불어 Lockdow으로 인해 여기저기 불안감과 공포심마저 감도는 요즘이다. 마치 감옥같이 집 안에서 나올 수 없어 바깥 돌아가는 뉴스 소식에 부정적인 생각들로 꽉 차기 마련이다. 이럴 때 박할머니의 글에서 엿보이는 ‘비우니 채워지더라’의 지혜를 우리 삶에 적용해 위기를 기회로 삼아 이번에 좋은 습관을 기를 기회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비우니 채워지더라>


오늘은 갈치, 내일은 고등어.

설날 남긴 냉동실 나물 녹여 비빔밥 해 먹고, 떡국 떡 꺼내서 어묵 넣으면 문구점 떡볶이로 변신하고, 신 김치에 냉동 돼지고기 넣고 버터 한 스푼 넣어 푹 끓이면 오모가리김치찌개 되고, 탕국 데워 밥 해동 시켜 말아 먹으니 제삿밥 먹는 것 같고, 보름 찰밥 해동은 밥 하루 안 해도 되는 공짜 삶이 되고, 콩, 조, 밤 등은 영양밥으로 변신하고, 곶감, 유과, 약과는 심심풀이 간식 되고, 인절미 녹여서 콩가루 무치니 고소한 찰떡이 되고, 절편 녹여 프라이팬에 구우면 바삭한 맛이 일품이다. 꿀 찍어 먹어봐.

작년 가을 깊숙이 모셔둔 송이는 아들 오는 날 별식이 되고, 꽁꽁 언 불린 미역으로 쌀뜨물 넣어 담백한 미역국도 끓이고, 제사 때 쓴 북어포는 무 빚어 넣고 계란 풀어 해장국 끓이고, 명란젓 얼린 것으로 계란찜도 하고, 새우 젖 넣고 잘생긴 무에 쪽파 넣어 봄 깍두기 만들고, 묵은지 두어 번 씻어 찬밥에다 달래장 살짝 얹어 먹으면 입안에 봄이 한가득, 돌덩이 같은 시래기 꺼내어 멸치 육수에 콩가루 무쳐 국 끓이면(무도 한칼 넣고) 콩가루가 몽글몽글 입안으로 절로 넘어간다. 냉동실 발가벗고 나니 은행 갈 일 별로 없고 한 달 생활비가 고스란히 남아있어 부자 된 기분이다.

  바깥나들이 안 하니 카드비 3분의 2가 줄고, 목욕탕 안가고 집에서 샤워만 하니 목욕비 줄고, 아침저녁으로 씻던것 하루 한번도 귀찮아서 안 하니 수도요금 줄고, 머리 자주 안 감으니 샴푸 린스 꼭지가 마르고, 손자 녀석 운동화 1주일에 한 번씩 씻는 것 한 달이 되어도 씻을 일 없고, 세수하면서 속옷과 가벼운 옷 주물러 빨면 세탁기 돌아갈 일 없고, 손자 녀석 학원 안 가니 학원비 나갈 일 없고, 어쩌다 운동 나가면 모자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 가리고 거지같이 나가도 누가 날 알아볼 리도 없고 부끄럽지도 않다.

통닭이 먹고 싶으면 전국에서 시켜줘도 대구에서 집 턱 앞에 배달되는 세상이니 코로나만 아니면 좀 답답해서 그렇지 비우고 나니 얻는 것도 많음을 깨달았다. 혼자 즐기는 법도 배우고 각자 위생을 챙기면서 희망을 가지면 그 또한 지나갈 것이다. 인적이 드문 조용한 시간대에 나가서 햇볕 좀 쪼이고 가벼운 운동도 한다.

열려있는 꽃가게에서 작은 화분 몇 개 사서 오면 베란다 문을 열 때마다 천리향, 긴끼아나, 수선화, 히야신스 향기가 내 몸속으로 깊숙히 스며들어와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 보리 한 되 사 와서 모아둔 플라스틱 통에 보리싹을 키우니 먹기도 하고 집안이 푸른 잔디밭이 되었다.

힘들다, 어렵다 하지 말고 즐기면서 사는 현명한 방법을 터득해서 우리 함께 위기를 잘 극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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