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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섭의 콩트세계> 수아의 명절날

수아는 지금 깊은 상념에 사로 잡혀 있다. 바로 조금 전의 일이다. 귀뚜라미 한 마리가 마음대로 활개치고 다니다가 수아와 딱 마주치는 순간, 살살 기어서 벽에 찰싹 달라붙어 꼼짝도 안한다. 아마도 자기가 안 보이는 걸로 착각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수아도 못 본 척 귀뚜라미를 그냥 지나쳤다.

순간 수아는 자기가 귀뚜라미 신세였던 어릴적 추억을 떠올렸다. 친구들하고 재잘거리며 잔뜩 마음이 부풀어서 빨리 이 밤을 새고 명절을 맞고 싶던 명절전날이었다. 가난했던 그 시절에 사방에 먹을 것이 넘치고 이집 저집 후한 대접을 받으며 세배를 드리면서 칭찬을 받다보면 그야말로 명절은 꿈이고 설렘 자체였다. 수아는 그 행복이 영원할 것만 같고 푸르른 마음은 하늘을 날아다녔다.

그런데 그날, 집에서 친구와 장난치고 놀던 수아가 그만 장독항아리를 깨뜨리는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겁에 질려 엉겁결에 집을 뛰쳐나온 수아는 태연한척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바로 그때 멀리서 걸어오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수아는 친구 뒤에 납작 엎드려 몸을 숨겼다.

‘어험’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머리도 보이고 치맛자락도 보인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수아를 못 보신 척 쓰윽 지나쳐 가셨다. 지금 벽에 착 달라붙어 있는 귀뚜라미를 보고 있는 수아는 어릴적 귀뚜라미 신세가 되었던 자기의 모습이 클로즈업 되어와 피식 웃음이 났다.

이제 곧 사랑하는 순길이를 만나 저녁을 먹어야할 시간이다. 저녁 먹을 생각을 하니 갑자기 어릴적 먹던 천하일품 요리가 생각났다. 수아네집 뒷동산 바로 앞 연못에는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늘 생명의 퍼레이드를 펼치곤 했는데 그걸 잡아 무 이파리를 넣고 부글부글 끓여 먹던 저녁만찬은 천하일품이었다. 연못을 가득 덮던 연꽃도 장관이었고, 굴뚝마다 뿜어대던 모락 연기는 다정한 친구들의 조잘거림처럼 보였던 좋은 시절이었다.

그때 향긋한 커피향이 수아의 코끝을 찔렀다. 순길이와 만나기로 한 유명한 커피집 앞이었다. 순길이는 수아와 결혼을 약속한 보기 드문 멋진남이다. 항상 수아를 아끼고 사랑하며 좋아하는 듬직하고 신앙심도 깊은 청년집사다. 연애시절 청춘남녀가 모두 그렇듯 수아는 순길이 생각에 가슴이 설레고 콩닥거렸다.

마치 새 옷, 새 신발을 차곡차곡 윗목에 놓아두고 뜬눈으로 날밤을 새던 어릴적 설명절의 기분 같았다. 수아는 커피집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언제 봐도 가슴 설레는 순길이의 저 미소! 수아는 함박 얼굴로 커피향내 가득한 찻집 안에서 순길이와 마주했다. 순진한 눈웃음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순길이의 손에는 장미꽃 한 다발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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