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은 죽음이다’라는 제목이 눈에 번뜩 띄었다. 요즘 ‘죽음학’이 인터넷을 핫하게 달군다더니 정말 그랬다. 유명 의사나 학자들이 ‘죽음학’이라는 학문을 들고 나와 굵직한 제목들을 붙여 강의를 하고 있었다. 모든 강의를 다 듣진 못했지만 근사체험이나 종말체험, 유체이탈 등 귀에 솔깃한 이야기도 있었다.
근사체험은 죽은 후 5~15분 후 다시 깨어나 터널을 통과했다거나, 빛을 봤다거나, 천국이나 지옥을 다녀왔다는 체험자들의 이야기를, 유체이탈은 자기 육체를 벗어나 붕 떠서 객관적으로 자기 육신을 보거나, 자기가 있던 병실이나 의사들을 봤다는 체험자들의 이야기를 강의에 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체험자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공통점이 있다며 자기 종교에 따라 강의 내용도 결론도 각기 갈렸다.
사후생이 있는가?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유교 사상대로 육은 땅에서 썩어 없어지고 혼은 공중에서 분해되어 없어지는가? 불교의 주장대로 이번 생을 잘 사는 게 다음 생을 준비하는 것일까? 자살은 정말 문제해결을 위한 올바른 선택일까? 안락사는 정말로 죽을 권리를 내세울 만한 존엄한 죽음일까?
사람들이 궁금해 할 제목들을 나열해놨지만 ‘죽음학’에 그 정답은 없다.
나는 학창시절에 학교에 가면서 병원을 들려가기도 하고, 병원에 입원하여 생사를 넘나들기도 하던 때가 있었다. “다 키운 자식을 이렇게 보내다니ㅡ” 아버지의 탄식과 후드득 흘리시던 그 굵은 아버지의 눈물줄기를 보던 날, 나는 ‘아~ 사람이 이렇게 죽는거구나’했다. 무서웠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나는 죽음과 마주 서있었다.
죽음을 맞닥뜨려본 사람은 복음이 명료해지는 법, 그때 죽음 너머에 하나님의 은혜가 선명하게 보였다. 볼을 타고 흐르는 내 기도의 눈물이 얼마나 뜨거운지 베고 누운 베갯잇을 적시고 귀 뒷머리까지 뜨거워왔다. 순간적이었다. 머리를 감싼 것 같던 얇은 막이 벗겨진 것 같더니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진 듯 했다. 갑자기 죽음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죽음 위에 나의 미래와 내세관이 서있었다.
죽음을 만나본 사람은 삶의 모양이 다르다. 하나님을 만나본 사람은 삶의 모양이 달라진다. 가슴 저 밑에서 말할 수 없는 희열이 올라왔다. 발이 땅에 붙어있지 않고 둥둥 떠다니는 듯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믿는다. 그래서 낙원을, 천국을,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산다. 회개한 강도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하신 그 낙원! 나사로가 갔고 부자가 음부에서 건너갈 수 없던 그 낙원! 그 천국을 바라보고 산다. 아니, 이미 그곳을 보장받은 천국시민권자들이다. 우리들은.
애벌레가 죽는 것은 곧 날개를 펴고 나비가 되는 것을 의미하듯, 달걀의 껍질이 깨어지면서 노란 병아리가 튀어나오듯, 우리의 죽음이란 육신이 죽음을 맞는 그 순간, 영혼이 하늘나라로 이사하여 옮겨져 사는 것이다. 영원히 그곳에서 사는 것이다. ‘죽음학’의 결론은 바로 이것이다. 천국에서 영생하는 것이 결론이다. <원더풀라이프> 발행인 박명순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