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의 그림 한 장으로 폭군아버지를 찾아낸 유치원 교사가 있었다. 아이는 자기아버지의 주먹을 아버지보다 두 배나 크게 그렸다. 폭군의 자식은 아버지의 주먹만 보이는 법이다. 참으로 못된 아버지다. 아내를 때리고 아들을 때리는 손은 ‘참 못된 손’이다.
유명한 그림 ‘기도하는 손’은 가난한 두 미술학도의 거룩한 감동으로 탄생되었다. 알브렛 듀러와 프렌츠 킹스타인은 노동을 하며 공부하기가 힘이 들어 교대로 공부를 하기로 하였다. 듀러가 먼저 그림공부를 하고 성공하여 돌아왔는데 불행하게도 킹스타인은 그간 힘들게 일을 하느라 손가락이 비틀어지고 굳어져서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고 굳어진 손으로 성공한 친구를 반기며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순간, 킹스타인의 기도하는 모습을 눈물로 지켜보던 듀러는 연필로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스케치하기 시작, 결국 걸작이 탄생된 것이다.
내가 자란 장성교회엔 ‘사랑의 손’과 ‘기도의 손’이 있었다. 사랑이 찰찰 넘치는 김승신 권사님의 ‘사랑의 손’은 팔팔 끓인 누룽지 한 공기를 들고 교회를 돌고 돌아 기어코 나를 찾아 먹이신다. 나에게만 그러신 줄 알았더니 개개인에게 맞춤형 사랑을 용케도 찾아 베풀고 계셨다. ‘기도의 손’ 김금주 권사님은 밤마다 교회에서 우리들 이름을 하나씩 불러가며 교계와 사회에 기둥이 되게 해달라고 철야기도를 하신다. 그러다 코를 골고 깜빡하신다. 우리가 까르르 웃음이 터지면 얼른 엎드려 끝내 새벽기도까지 마치고 가신다. 흉내도 낼 수 없는 분들이다.
우리 엄마의 손은 ‘일손’이셨다.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하셨다는 전설 같은 시집살이로 망가진 손이고, 자식들과 손주들을 키워낸 트이고 터진 손이다. 그 덕분에 잘들 자랐으니 ‘성공의 손’이라고 울음 해본다. 나는 엄마의 우상인 외아들인 우리 오빠가 자기자식들 키우느라 얼음 박히고 트여 피가 나는 엄마의 뻣뻣한 손을 따듯하게 입김을 불어 한번쯤 녹여주기를 바랐지만 끝내 내 오빠는 그걸 안했고 돌아가신 후 땅을 치고 우는 것을 보았다.
나를 울컥케 한 ‘며늘의 손’이 있었다. 은퇴 후 순회선교사로 타국으로 떠돌 때였다. 아이들 사진 옆으로 애들을 붙들고 있는 며느리의 핏기 없이 마른 손이 보였다. 그 손은 어떻게든 할머니에게 손주들의 모습을 더 잘 보이도록 하려는 어미의 심정이 찡하고 내게 전달되었다. 힘들어 보였다. 딱하고 가여웠다. 한번 끌어안아주고 싶었다.
세 살 반짜리 내 손녀 수아의 ‘기도 손’ 사진은 나의 기쁨조다. preschool 다닐 때 학교에서 찍어준 사진이라는데 하얀 아크릴 액자에 넣어 TV 받침대 위에 놓았는데 때론 도전도 받는다. 두 눈을 꼭 감고, 고개를 다소곳 숙이고,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무슨 기도를 했을까 참 궁금하다. 아직 말도 서툴고, 손익계산도 없고, 감정의 덧셈뺄셈도 없는 어린 것이 무엇을 주님과 속삭였을까? 그야말로 몸과 마음으로 드린 그 기도를 주님은 또 무슨 응답을 주셨을까? 참 닮고 싶은 ‘기도의 손’이다. <원더풀라이프> 발행인 박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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