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은 종종 그를 바보라 불렀다. 나도 같은 의사의 입장에서 평생 방 한 칸 없이 살다간 의사가 어디 있느냐며 그 분을 ‘바보처럼 살다간 분’이라 생각한다. 철저한 신앙으로 겸손하게 살면서 죽어가는 환자 한 사람 한사람에게 최선을 다했던 분, 가난한 자들에게 사랑의 실천가로 자선을 베푸신 분, 그분은 의사 장기려 박사이다.
어느 지인이 최근에 장기려 박사를 기리는 글을 보내왔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감동이 되는 이야기인지라 나도 <원더풀라이프>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졌다. 요즘 엉망인 나라꼴 때문에 우리들 마음꼴도 엉망이어서 함께 위로를 받고자 함이다.
“제가 밤에 뒷문을 열어 놓을 테니 집으로 가세요” 병원비 걱정을 하는 어려운 환자를 병원 뒷문으로 몰래 빼돌린 장기려 박사의 이런 배려는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이 환자에게는 닭 두 마리 값을 내주시오- 원장” 퇴원 후 잘 먹어야할 환자에게 써준 장기려 박사의 이런 처방전도 유명한 일이다.
서울대, 부산대의대교수, 부산복음병원원장의 화려한 경력이 있지만 그런 경력이 무색하리만큼 가난하기 짝이 없는 분, 그는 1947년, 김일성대학 의과대학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과장으로 부임할 때도 “나는 주일에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라는 조건 하나를 달고 간 분이었다. 수술할 때는 언제나 의술보다 기도가 먼저였던 분, 그는 평생 신앙 제일주의였다.
월남 후 1951년 5월, 부산의 한 창고를 빌려 간이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들과 전쟁부상자들을 무료로 진료하기 시작하여 복음병원을 시작했고, 1989년, 영세민 조합원에게 의료혜택을 베풀기 시작하여 민간의료보험을 시작했고, 뇌경색으로 반신이 마비될 때까지 무의촌 진료를 다니신 속속들이 의사였던 분이다.
1950년 12월, 평양의대 병원2층 수술실에서 밤새워 부상당한 국군장병들을 수술하다가 갑자기 폭탄이 병원 3층에 떨어져 국군들과 급히 철수를 하면서 아내와 생이별을 하며 남하한 그에게 남은 것은 빛바랜 아내의 사진 한 장이었다고 한다.
아내의 사진 한 장을 가슴에 품고 평생 홀로 지내던 그가 아내를 그리며 쓴 망향편지가 소개되었다.
ㅡ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깼소.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보니 그저 캄캄한 어두움 뿐. 허탈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1990년에ㅡ
한 제자의 주선으로 중국에서 부인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내가 그런 특권을 누리면 다른 이산가족들의 슬픔이 더 커진다”며 극구 사양하다가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 1시 45분,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장기려 박사는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주를 섬기면서 살다간 사람’이라고 비문에 적어 주십시요”라 적었다. 그러나 언론은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작은 예수’라 비문에 적혀 있다고 전한다. <김재동 / 전직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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